달리지 않았기에 살아남았다 — 1997년 포항제철과 2026년 POSCO의 역설
1997년의 포항제철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는 아마 이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빚을 늘리지 않았다. 문어발식 확장을 하지 않았다.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에 맞춰 과속하지도 않았다. 당시 재계 일각에서는 ’국가 자산인데 너무 보수적으로 운영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시대 흐름을 못 읽는다고.
그것이 틀렸다는 게 밝혀지는 데는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1997년 8월, 한국은 달리고 있었다
▲ 1997년 말 IMF 구제금융 신청 직후 원/달러 환율은 불과 두 달 만에 850원대에서 1,962원까지 치솟았다.
1997년 여름, 한국 재계에는 하나의 암묵적 법칙이 있었다. 빚을 내서 크게 키우면 정부가 살려준다. 한보철강이 그렇게 달렸다. 삼미·기아도 마찬가지였다. 30대 그룹 평균 부채비율은 400%를 넘었다. 증권사들은 그 기업들의 성장 스토리를 팔았고, 투자자들은 매수했다.
그 무렵 동남아시아에서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다.
7월 2일 태국 바트화가 폭락했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이 연쇄 강타됐다. 8월 들어 외신들은 ’Asian Miracle’이 끝났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보철강은 1월에, 삼미그룹은 3월에, 기아자동차는 7월에 이미 쓰러져 있었다. 외환보유고는 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그해 11월 21일, 한국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업이 살아남았다
▲ IMF 구제금융 직전, 포항제철의 부채비율은 53%였다. 한보철강의 약 1/26, 30대 그룹 평균의 1/8 수준이다.
그 혼란 속에서 포항제철의 부채비율은 **53%**였다.
사실상 빚이 없는 회사였다. 30대 그룹 평균의 1/8 수준. 한보철강(약 1,400%)과 비교하면 거의 다른 행성의 숫자다. 국제 신용평가사들조차 “한국 기업 중 가장 건전한 재무구조”라고 인정할 정도였다.
포항제철은 달리지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은 것을 넘어서 — 위기가 만들어낸 기회의 주인공이 됐다. IMF 구제금융 조건 중 하나는 공기업 민영화였다. 포항제철은 국영기업이었고, 1998년 정부는 민영화를 결정했다. 2000년 주식 공개, 2002년 정부 지분 완전 매각. 1968년 박태준 초대 회장이 국가 자본으로 세운 철강 공장은, 35년 만에 민간 기업 POSCO로 탄생했다.
그리고 2022년,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며 POSCO홀딩스가 됐다.
반전 — 그 기업이 지금은 전력질주 중이다
여기서 이야기가 뒤집힌다.
▲ POSCO홀딩스 주가는 2024년 초 고점(31만원대) 이후 조정을 거쳐 24만원 수준에서 바닥을 다지고 있다. (참고용)
2020년대의 POSCO홀딩스는 1997년의 포항제철과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호주의 리튬 광산 지분 확보. 자회사 POSCO퓨처엠(003670)을 통한 양극재·음극재 대규모 투자. 전기차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리튬을 직접 채굴하고, 정제하고, 배터리 소재로 만들어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에 납품하는 수직계열화 — 이 모든 것에 수조 원을 쏟아붓고 있다.
왜 달라졌는가.
답은 경쟁 구조다. 철강은 성숙 산업이 됐다. 중국이 공급을 장악하고 가격을 흔든다. 1997년처럼 ’버티는 것’으로는 미래가 없다. POSCO가 선택한 것은 전기차 공급망의 상류를 선점하는 것 — 리튬이라는 새로운 ’철광석’을 먼저 잡겠다는 판단이다.
1997년의 포항제철이 옳았던 이유는 ’달리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달릴 이유가 없어서였다. 철강은 독점에 가까운 구조였고, 기본기만 지키면 됐다. 지금은 다르다. 달리지 않으면 자리가 없다. 그래서 POSCO홀딩스는 달리고 있다.
지금 이 주식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솔직히 말하면, 지금 POSCO홀딩스는 쉬운 주식이 아니다.
2023~2024년 리튬 가격 급락이 POSCO퓨처엠 실적을 직격했다. 철강 부문도 중국 공급 과잉으로 마진이 얇다. 주가는 2024년 초 31만원대 고점에서 24만원 수준으로 내려앉아 바닥을 다지고 있다.
관건은 두 가지다. 첫째, 수직계열화가 완성되는 2027~2028년 이전에 이 기업이 버틸 수 있는가. 둘째, 전기차 수요와 리튬 가격이 그 시점까지 회복되는가. 둘 다 맞아떨어진다면, 지금 구간은 ’가장 어두운 새벽’일 수 있다. 하나라도 어긋나면, 수조 원짜리 베팅의 후폭풍이 크다.
1997년의 포항제철은 빚이 없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다. 2026년의 POSCO홀딩스는 수조 원을 이미 쏟아부었다. 참아야 할 이유는 같지만, 참을 수 있는 조건은 다르다.
그 차이를 어떻게 보느냐가, 이 주식의 진짜 질문이다.
본 포스팅은 투자 권유가 아닙니다. 투자 결정은 본인의 판단과 책임하에 하시기 바랍니다.